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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르트헤이트

백인 중심의 정부 설립과 이에 대한 반발

1910년 케이프지역과 나탈, 트란스바알과 프리스테이트를 통합한 백인 중심의 남아프리카연방이 세워졌다.

이에 대한 흑인의 반발은 불가피한 것으로 1912년 흑인들은 아프리카국가회의(ANC)를 출범시키고, 흑인을 배제하는 정권에 대한 항거로 이어졌다. 1921년 무력투쟁이 고조되어 갈 무렵 남아공의 공산당이 창설되었다.

인종차별적인 정권에 대한 반발이 더욱 거세어지는 과정에서 1913년 '원주민토지 법(Native Land Act)'이 제정되었다. 이는 흑인이 선조 때부터 소유한 땅 이외의 땅을 파악하여 나머지 땅을 백인들이 차지하기 위한 수법이었다. 당시 ‘홈랜드’로 불리는 흑인 소유의 땅은 남아공 전체 토지 면적의 약 13% 밖에 되지 않았다. 또한 백인들에게 특혜를 주는 고용 관련 법과 케이프 지역의 혼혈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는 등의 차별 법안들이 통과되었다. 한편 세계적으로 불어 닥친 불황으로 인해 실업이 증가하면서 아프리카너들의 국수주의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아파르트헤이트의 탄생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아프리카너 중심의 국민당(NP)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1948년 남아공의 악명 높은 아파르트헤이트 제도가 탄생하였다. 이는 과거의 인종차별 정책보다 더 심하고 독재적인 방법을 채택하였다.

남아공의 백인 중심 정권의 권력이 강화되자 흑인 반대파도 더욱 활발한 활동을 벌인다. 1943년 젊은 세대로 이루어진 정치 세력이 등장하여 ANC 청년 연합을 설립하게 된다. 이를 통해 넬슨 만델라와 올리버 탐보, 월터 시술루 등 ANC 를 이끌 차기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민주화 운동의 탄압

1961년 HF 벌보어드 총리가 이끄는 남아공의 국민당 정권은 백인만의 국민 투표에서 승리한 뒤 남아공을 공화국으로 선포한다.

새 정권의 인종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새로 재정된 법에 드러나 있었다. 다른 인종간의 성행위를 금지하는 것을 비롯하여 주민 등록에 있어서 모든 남아공인들은 특정 인종에 속하도록 해야 한다는 규정 등이 포함되었다.

거주 지역에 대한 차별도 이루어졌다. 마을 주민 전체를 유색 인종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조치도 시행되었다.

분리 발전

당시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음에도, 남아공의 백인 정권은 분리 발전 정책을 고안해 내어 각 아프리카 민족을 임의적으로 민족 '국가'로 분리하고, 각각의 '홈랜드'를 지정함으로써 말뿐인 '독립'을 보장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사실상 지방의 토지는 이미 인구 과밀화 현상과 경작 남용 등으로 땅이 황폐화되었다.

백인 거주 지역에서 강제 이주된 흑인 및 유색 인종의 수는 약 350만 명에 달하며 홈랜드로 불리는 지방 마을에서는 빈민가가 형성되었다. 통행법과 주민 수 제한 등의 규정이 더욱 확대되어 엄격히 적용되기 시작했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시행되면서 1949년 ANC는 행동계획에 착수하는데, 이는 재정비된 1940년대의 무장 투쟁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행동계획은 백인 정권의 지배를 거부하고, 항의와 파업, 시위 등의 행동을 촉구하는 것이었다.

저항의 시기

대규모 시위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1955년 소웨토 의회에서는 자유의 헌장이 낭독되었다. 이 선언문에서는 이때까지의 투쟁을 인권과 반 인종차별의 문화로 묶는 투쟁의 원칙을 발표하였다. 얼마 후 정부는 ANC와 PAC등의 대규모 조직 활동을 금지하였다.

한편 1960년 샤프빌에서 통행법에 반대하던 시위자 69명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면서 문제가 터지게 되었다. 국가비상사태가 선포되었고 재판 없이 구속이 가능해졌다.

자유를 위한 투쟁

흑인 정치 조직의 지도자들은 이 당시 모두 체포되었거나 망명 중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ANC와 PAC는 오랜 기간 고수해온 비폭력 저항 노선을 포기하고 독립을 쟁취한 이웃 국가들에 기반을 두고 무장 투쟁에 나섰다.

국가 내에 머물고 있던 ANC의 새로 창설된 무장 세력인 <음콘토 위 시즈웨(국가의 창)> 소속의 최고 지도자 등은 1963 년 정부에 체포되었다. 악명 높은 '리보니아 재판'에서 만델라를 포함한 8명의 ANC 지도자들은 (본래 기소된 ‘ 반역 ’ 혐의가 아닌) 국가 전복을 기도한 죄로 종신형을 언도 받는다.

1960년대 내내 반대파의 무력행동을 제압하기 위한 특단의 조치들이 행하여졌지만 1970년대 초 부활하기 시작한 저항 운동은 거센 움직임을 보였다.

1976년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한 지속적인 항거를 위한 혁명의 시작이었다. 그 해 6월 소웨토의 초등학교에서는 아파르트헤이트의 교육 정책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시위가 발발하여, 이는 전국적인 어린 세대의 봉기로 이어졌다. 민주화 세력은 단호한 법적인 방법을 통해 국가와 맞섰지만 이에 대해 정부의 유일한 대책은 극단적인 억압 뿐이었다.

개혁 조치

엄청난 규모의 시위와 항거 에 당황하게 된 백인 정부는 1980년대 초에 들어와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일례로 흑인 노조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1983년 개헌을 통해 소수 민족인 컬러드와 인도인의 하원 참여가 제한적으로 허용되었지만 이에 대한 지지는 미약하였다.

1986년 원성 높았던 통행법이 마침내 폐지되었고, 이 때에는 아파르트헤이트 종식을 위한 국제 사회의 압력이 더욱 강화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의 마지막

1990 년 2 월 당선된 FW 드 클러크 대통령은 민주화 운동에 대한 해금 조치를 취하고 유명한 만델라 등의 인사를 포함, 흑인 정치인들을 석방시켰다.

(Source :Pocket Guide to South Africa)